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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수업


사회디자이너(Social Designer)란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 무엇을 하면 좀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이며 효율적이고 합리적일지 생각하는 이들. 사회디자이너란 말은 박원순 변호사가 지난 2006년 희망제작소를 만들고 확산시킨 새로운 직종이다. <시민사회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은 책으로 사회디자이너 53명의 “살아오면서 지금의 나를 만든 삶의 터닝 포인트” 란 주제로 이야기 했다. 사회학자. 과학자. 환경가. 운동가. 교육자.농부. 노동자. 환자. 변호사 .학생. 주부. 택시기사. 기자 .방송인..… 각자 분야에서 다양한 일들을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잘하는 분야에서 사회디자이너로 다시 출발 을 하는 계기가 된다. 무슨무슨 단체들. 위원회.연구소.재단.운동본부.인권.언론협회.시민단체.연합.전국연맹 등 과자종류처럼 너무 많은 이름들이 정치적인 성격으로 보였었다. 사실 난 뉴스에서만 그들의 단체들 이름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들 또한 다들 회사원들 처럼 직장에 다니는거겠지 했다. 좋은 일에 앞장 서겟지만, 때로는 그들을 그저 순수하게만 지지할 수는 없는 의견들이 있었다. 이런 판단들은 그들도. 지켜보는 시민들 역시 헷갈리고 무심한게 대부분이다. 난 촛불하나 드는것도 갈까말까 망설이고 목소리 하나 내는것도 귀찮은 이기적인 시민이다. 나 아니여도 다른사람들이 열심히 뛰고 있는데, 굳이 나까지 나서는 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 한다. 하지만, 53명 또한 나 같은 이기적인 시민이였지만, 다양한 인생의 첫수업을 만나거나, 듣거나, 사건을 겪은후 달라졌다. 달라져야 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단체들의 출발은 모두 자발적이였고, 각자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자 라는 사연을 품고 있었다. 자신의 사회디자이너로 살게 된 계기. 대부분이 아픈 이야기였고, 그 아픔을 희망으로 바꿔보자고 목소리 내는 이들이였다. 사회디자이너란 직업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53명 또한 각자의 분야에서 직종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일들을 바탕으로 사회에 필요한 부분들을 돕고, 새로 만들고, 고치고, 반대하는 이들과 싸우고 있다. 돈도 안되면서 뭘 그리 쫒아다니싶니까? 라고 묻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뭐 그런다고 큰 힘을 이길 수나 있겠어? 라고 어쩔수 없이 승복하라는 푸념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 기운 빠지는 일들의 반복속에서도, 희망을 만들고 싶기에 한 목소리를 낸다. 이들의 특징은 부모님이 정해준 일도 아니고, 성적에 맞춰 하는 일도 아니다. 더군다나 고액연봉도 아니다. 자신 스스로가 선택하였고 더 잘 살아보겠다는 나눔이다. 힘이 없는 약자 앞에 당당히 방패가 되어 싸울 준비 태세를 갖추는 사람들. 단 한사람의 목소리라도 전하고푼 사람들. 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야 말로 큰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커다란 벽시계를 보며,모든 시민들이 오늘이 몇시인지 알수 있고, 당연하게 시계를 보고 각자의 일을 마칠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우린 시계를 보며 밥을 먹고, 퇴근을 하며, 평온하게 잠자리에 든다. 그 뒤에 움직이는 수많은 톱니바퀴가 얼마나 힘겹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오늘 이 책을 읽고 그 작은 톱니바퀴 단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싶다. 언젠가는 나 또한 작은 톱니바퀴가 되어 큰 시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하고싶은 말이 많아, 답답한게 많아, 재능이 필요한 곳에서 돕고 있는 나를 기대한다. 시민 각자 하나하나가 가질 수 있는 또다른 직업.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 깨어있는 시민! 사회디자이너! 함께 꿈꿔 볼래요 **책 속으로** 스무 살에 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한 그분을 나는 상념 속에서는 수도 없이 만났다. 그분은 나에게 살아남은 것이 부채임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준다. 그분은 내 삶의 처절한 교사다. 내가 사람에게 분노하는 대신 그런 사람을 낳는 사회에 분노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과 싸우기 보다는 그런 사람을 낳는 사회와 싸우고 나 자신과 싸우려고 애쓴다면, 그 속에 그분의 삶이 나에게 가르져준 바가 있음을 빼놓을 수 없다. 그분은 그의 삶을 통하여 나에게 무엇보다 인간의 삶에 하염없이 겸손할 것을 가르쳐주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죽는 그날까지 홍세화 주변 사람들이 내게 왜 지구촌 나눔운동 같은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모잠비크 여성운동가가 있다. 1995년에 베이징여성대회에서 만난 이 여성은 당시 일하던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명함을 내놓는 내게 “당신이 지구적 차원의 경제정의를 위해 하는 일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구촌 나눔운동을 열심히 한다. 그에 앞서 내 마음속에 ‘사회적 책임’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해준 강순임 선생님이 계셨다. 나도 선생님처럼 젊은이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젊은이들을 만난다. 김혜경 전남도청 앞 무덕관에 피 묻은 태극기로 덮인 무수히 많은 관들을 보면서, 쓰러져 있는 청년들을 군일들이 철사 같은 것으로 교살하는 듯한 장면을 보면서는 내가 살아 호흡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주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그 5월 광주 그리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간 수많은 이들을 보면서 난 속으로 무수히 다짐하였다. 살아 있었다면 미래에 대한 무수한 가능성을 안고 있었을 저들이 저토록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팔자 좋게 해외에 유학이랍시고 나와 있으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지….. 이제 앞으로의 내 삶은 저들이 못 다 이룬 꿈을 대신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다짐했다. 5월 광주는 나뿐 아니라 당시 독일에 있던 많은 유학생과 교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유학생들 중 일부는 벼랑 끝까지 몰린 조국의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잇는 일들이 어떤 일들인지 여러 가지로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고민 중의 하나가 학술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정범구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인한 가장실직자가 증가하고, 일자리도 양극화되는 가운데 가난의 고리를 끊어낼 직업 찾기도 쉽지 않다. 이에 더해 이혼증가로 여성가장 세대도 증가해 여성의 사회진출은 더 이상 배부른 자아실현의 욕구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부모의 실직으로 알코올중독. 가정폭력. 빈곤. 자녀유기. 가족해체 등 2차적 문제들이 파생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협받고 불안감에 떠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이제 좋은 교육환경이 주어졌으니 발달과업을 완수하라는 요구는 버겁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의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 찾기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또 다른 의미 있는 활동을 경험하고 있다. 결국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내 인생의 스승이자 이정표를 제시해준 사람은 ‘가난한 가족’이였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은애 가족 안에서 마저 여성의 침묵을 미덕이라며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여성의 침묵만을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인 풍조가 만연하던 한국의 1970년대 그 침묵은 권력이 모든 피지배자에게 강요하던 미덕이었다. 나는 그러한 사실을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교육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여성이자 노동자라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확고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비로소 나는 여성이면서 노동자인 나 스스로를 위해 운동을 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면서 나는 이후 항상 기쁘고 즐겁게 투쟁할 수 있는 밑거름을 가지게 됐다.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나의 삶을 바꾼 그때의 경험들이 지금의 최순영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로 사는 행복이 늘 나의 곁에 있도록 해주었다. 최순영 그날 밤 우리는 경찰서에 끌려가 내내 큰소리와 야유와 주먹질 속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세상에 나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를 지켜준다고 믿던 군인과 경찰이 어떻게 나를 짓밟는지, 국가권력이라는 것이 힘없는 국민을 짓밟게 되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우게 된 첫수업이었다. 그날 새벽이 되어서야 풀려나와 내 작은 자취방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내가 한갓 군홧발에도 자근자근 짓밟힐 수 있는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 너무 슬퍼서, 그 비참함에 울었다. 나라란 나를 지켜준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 첫 수업이었다. 정부도 군대도 경찰도 나를 짓밟는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배운 거였다. 그날 밤 나는 다짐하였다. 권력이 부당하게 국민을 짓밦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그 새벽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첫 수업으로 인해 헤르만 헤세처럼 낭만적으로 살고자 하던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꿔지리라고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뒤로 오늘까지 사람이 온전하게 대우받는 세상을 향한 미완의 꿈은 오늘도 내가 살아가는 중요한 존재 이유이다. 이학영 끌려가던 한 학생의 머리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러나 끌려가던 학생의 입에서는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라는 외침이 그 이상한 청년들의 폭행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흐럴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살벌하고도 처절한 광경에 얼어붙어 버렸다. 모든 것이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알아버렸다. 내가 그동안 검증된 교과서에서 배워온 사회와 역사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공부하기 싫어 데모한다는 비난이 얼마나 악의에 찬 거짓이없는지를.. 단박에 알아버렸다. 공부하기 싫어 데모하는 놈들이 저렇게 매 맞으며 처절하게 끌려갈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나의 인생은 달라져 버렸다. 검증된 교과서를 버리고 전두환 정권이 금지한 금서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두려웠지만 ‘공부하기 싫어 데모하던 대학생들’처럼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행로를 바꿔놓은 ‘내 인생의 첫수업’은 교실 안도 아니요. 훌륭한 선생님의 말씀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피 흘리며 끌려가던 현실과의 조우遭遇였다. 권영국 어느 땐가부터 내 사전에는 유료로 무엇을 사오는 법이 없었다. 물건을 기부받았던 것이다..나중에는 아예 ‘날개를 달아주십시오’ 라는 캠페인을 벌여 어떤 청소회사가 우리 사무실의 니스 칠을 공짜로 깨끗이 해준 사례도 있었다. 이러면서 내 머리도 하나씩 벗겨지고 희어져 갔다. 그 후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 가게를 거치면서 나는 모금의 최고 전문가가 되었다. 그래서 과거보다 전화도 훨씬 잘 걸고, 넉살도 잘떨고, 잘 받아내기도 한다. 심지어 모금전문가학교를 열어 그 학교의 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 법이다. 시민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온갖 영역에서 팔방미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도 열심히해야 하지만 돈도 벌어와야 한다. 이런 이중고에서 해방되기가 어렵다. 월급은 없거나 작게 받는다.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길을 걷던 독립운동가나 다름없다…여전히 나는 그 고난의 길 위에 서있다. 박원순 즐거운 자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한 녀석이 다가왔다.1987년 그날 아침, 마지막에 창가 커튼에 매달려 있다고 혼을 낸 바로 그 녀석이었다. “그날 사실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막 나부껴서 묶으려고 했었어요.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아, 이런 세상에….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기억에는 ‘인간쓰레기’로 아이들을 모욕하던 교장만 남아 있지만, 이 녀석에게는 자신의 진정을 알릴 기회를 못 얻어 오래 가슴 속에 맺혔던 전혀 다른 의미의 기억이 있던 것이다. 이날 이후 나는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 설명을 못하겠거든 내가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지 등을 아이에게 묻게 되었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은 이렇게 두 번의 커다란 교육적 충격을 내게 주었다. 그중에서도 그 녀석으로부터 받은 두번째 충격은 교사의 미덕이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임을 깨우쳐준, 부끄럽지만 참으로 고마운 계기가 되었다. 정진화 꼬리치레도룡농의 출현으로 보아 보전가치가 충분하다는 결론을 제공하고 돌아서려는데 식물생태 조사를 담담한 교수는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태계 보전을 위해 애쓰던 그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권했고 나는 엉어주춤 주저 앉았다… 농사짓는가도 무시하는 건가. 민주화되었다 해도 소용없는 일인가. 어디 하소연도 못 하고 빼앗기나 싶었는데 환경단체의 젊은이들이 찾아와 도와주었다 한다. 그래서 희망을 가졌는데 학자들까지 찾아와 보호해야 할 생태계라고 말해주니 주민들은 고맙기 그지없다며 막걸리를 한상 차렸다… 그 과정에서 강압적이며 불합리한 결정의 뒤에 돈과 권력에 충성하는 과학기술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그래서 과학은 가치중립이라고 믿던 ‘이공계’는 인문학을 더 공부해야만 한다는 걸 절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무터 읽은 <녹색평론>등의 책은 천박하던 나의 생태의식을 깊어지게 했다... 한동안 환경운동가라는 말이 어색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환경운동하는 생태학자라는 소개에 고마워하고, 생태주의자라는 지적(?)을 칭찬으로 오해하는 화상이 되었다. 모두 그 어색하던 막걸리 술상자리 덕분이다. 박병상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예수에게 해준 것이라 했다. 코흘리개 꼬맹이, 페놀을 마시던 어린 친구, 그리고 여동생은 내가 만난 예수였다. 이렇게 내 인생의 첫수업은 가난한 이웃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로부터 이루어졌다. 문창식 농촌을 돕겠다고 떠났지만, 막상 큰 가르침을 받은 것은 우리들이었다. 성실하고 정직한 농부들의 모습, 순박하고 자연친화적인 시골의 생활방식을 보면서 모든 것이 갖추어진 도시에서 편안함만 추구하며 살아온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교만하고 게을렀던가를 돌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땀흘려 일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보면 농활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모양이다. 내 인생 최초로 땀 흘리는 노동의 즐거움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던 농활은 대학시절 들은 어떤 강의보다도 기억에 남는 소중한 수업이다. 이유정 1부 | 희망을 말해주던 인생의 스승들스물에 만난 그의 질긴 삶 _홍세화‘싸가지’ 없던 학생의 유일한 스승 _오창익‘소도둑놈’ 선생님의 혼이 깃든 가르침 _정찬용대전교도소에서 배운 민중의 삶 _김제선어머니가 받고 있는 ‘치매’라는 수업 _고은광순동양고전을 공부하게 된 한 정치학자의 깨우침 _배병삼내 이름에 얽힌 자존감의 의미 _김금옥데모 못하는 대학은 삼류다? _송재봉앎에 대한 열정이 이어준 영국인 스승과의 인연 _서순탁삶의 화두가 된 친구 K의 충고 _권미혁나눔을 실천하는 ‘책임’을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실행하는 사람들, 무엇을 하면 좀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이며 효율적이고 합리적일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사회디자이너(Social designer) 라고 부른다. 이 책은 이 시대의 사회 디자이너 53인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자신의 삶에서 중대한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의 남은 삶을 그 가치에 쏟아 부을 수 있었던 사건이나 계기-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지난한 길을 걸어온 한국의 대표적 사회디자이너들의 글에서는 민주화와 성숙한 시민사회 발전을 위한 그들의 고투가 그대로 묻어난다. 인생의 나침반을 쥐어주거나 비바람을 막아준 삶의 거울 같은 인생의 스승을 회고한 글부터 시대의 불의에 맞서 깨어있는 양심 으로 살아온 이야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얻은 배움의 소중함을 담은 이야기까지 깨어있는 시민들 과 행동하는 양심 의 길에 선 이들의 기록이 이 책에 가득 담겨 있다.

53명의 사회디자이너들은 오늘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각자의 현장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자신의 젊음과 생을 바쳐 구현하고자 하는 가치는 글 속에 살아서 글을 읽는 이들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사회디자이너들의 삶과 글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통해 깨어있는 시민 이 되기 위한 더 많은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펴내며

1부 | 희망을 말해주던 인생의 스승들
스물에 만난 그의 질긴 삶 _홍세화
‘싸가지’ 없던 학생의 유일한 스승 _오창익
‘소도둑놈’ 선생님의 혼이 깃든 가르침 _정찬용
대전교도소에서 배운 민중의 삶 _김제선
어머니가 받고 있는 ‘치매’라는 수업 _고은광순
동양고전을 공부하게 된 한 정치학자의 깨우침 _배병삼
내 이름에 얽힌 자존감의 의미 _김금옥
데모 못하는 대학은 삼류다? _송재봉
앎에 대한 열정이 이어준 영국인 스승과의 인연 _서순탁
삶의 화두가 된 친구 K의 충고 _권미혁
나눔을 실천하는 ‘책임’을 배운 시간들 _김혜경
너의 머리로 남의 행복을 생각하라 _김영호
힘들수록 유머를 잊지 말라던 그 뜻 _나효우
‘학문하기’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배우다 _조명래

2부 | 시대와 역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독일에서 맞은‘5월 광주’, 그리고 그 약속 _정범구
‘군 부정선거 양심선언’을 이끈 중대장의 눈물 _이지문
‘보도지침사건’이라는 역사로 남은 인생수업_김주언
부모를 기다리던 단칸방 아이들의 죽음 _이은애
‘여자 공원’에서‘여성노동자’로 다시 태어나다 _최순영
‘똥물세례’를 받은 동일방직 노동자와의 만남 _남윤인순
군홧발 아래서 배운 민주주의 _이학영
노조결성 2시간 만에 계엄령이 떨어졌지만 _배옥병
피 흘리던 현실과 모범생의 만남 _권영국
촛불의 바다, 무대에 오르며 _노정렬

3부 | 실천과 배움을 나누며 함께 꾸는 꿈
고난의 수업은 계속된다 _박원순
교사는 학생들로부터 배운다 _정진화
꼬리치레도롱뇽과 어색하던 막걸리 술상 _박병상
〈쉰들러 리스트〉 같던 농촌학교 지키기의 추억 _전성환
부족함 속에서 얻는 삶의 여유로움 _김혜애
본전을 뽑고도 남은 그 수업 _김언경
사회 변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_오성규
아토피를 앓는 아이들 _박진섭
생의 가장 절박한 수업, 백혈병에서 살아남기 _강주성
IMF의 상처를 딛고 나눌 수 있던 마음들 _위정희
여성이기에 후회 없는 최고의 선택 _이화영
어떤 이유로든 희생은 안 된다 _이호

4부 | 삶은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전한다
아직도 갚지 못한 인생의 빚 _김성훈
가난한 이웃의 모습으로 온 예수 _문창식
의약분업 논쟁의 광기 속에서 버틸 수 있게 한 그 힘 _이상윤
택시기사들과 맺은 걸쭉한 연대 _박세길
더운 여름날의 ‘짜고 치던’ 어떤 수업 _김성인
농활서 먹은 꿀맛 같던 감자의 기억 _이유정
10남매 막내와 하늘나라 어머니의 데이트 _정청래
대안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_조희연
산골에서 찾은 강호제현의 한 수 _곽노현
자네는 차라리 유학을 가게나 _김남근
음악다방 디제이가 겪은 새 세상을 향한 열병 _지금종
어쭙잖은‘위장취업’, 부끄럽지 않게 살기 _오관영
철마산 자락에 뿌린 가슴시린 청춘의 흔적 _김성희
관념의 숲을 헤치고 사람들 속으로 _남효선
학문의 길로 이끈 총학생회장 낙선 _이장희
앞으로 계속될 새로운 수업을 기대하며 _최승국
인생수업의 중간성적표를 적어보자 _이승희